Friday, January 23

해 따기

"그렇다. 결국 우리는 목적 없는 길을 홀로 걷게 숙명지어져 있다. 그 허망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신화를 지어내고 자진하여 미신에 젖어들지만 누구도 그런 숙명에서 벗어날 순 없다. 아아, 좀더 일찍 그걸 깨달았다면 나는 지나쳐 온 아무곳에나 머물러 그 평범한 주민이 되었을 것을--- 그리고 가엾은 육신이나 평안하게 길렀을것을......"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는 전보다 몇 배나 희어지고 수염이며 눈썹까지 하얗게 변했습니다. 등도 활처럼 굽고 온몸은 깊은 주름과 노년의 윤기 없는 피부에 감싸였습니다. 스스로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늙음이 덮쳐 온 것이었습니다. 그의 얼굴에는 절망과 비통의 굵은 눈물이 번쩍이며 흘러 내렸습니다. "나무여!" 그는 갈퀴 같은 손으로 그 나무의 밑둥을 만지며 쉬엄쉬엄 말했습니다. "이제 나는 이처럼 늙음을 맞았으니 죽음도 머지 않을 것이다. 뒷날 그녀가 오거든 전해 다오. 그래도 나는 온갖 힘을 다하여 그녀를 열망하였음을. 그리고 또 전해 다오. 내가 눈물 속에 죽어갔음을......" 순례는 잠시 숨을 모은 후에 다시 계속했습니다. "내 뒤에 올 수많은 나그네들에게도 전해다오. 어떤 이유로든 해 같은 걸 따겠다는 어리석은 야망을 품지 않도록. 어떤 신화가 어떤 약속을 하든 가장 좋은 것은 언제나 이 땅과 우리들에게는 속해 있지 않음을 잊지 말도록......" 그리고 오래잖아 그는 숨졌습니다. - 이문열, <젊은날의 초상>에서